술. (3/27)
야간에 일한다는 것은, 늦은 시간에 창밖을 바라보며 흔히 빠지게 되는 '우울한 감상' 이라는 이름의 행복과, 인간에게 주어진 생활 사이클을 거스르는 자에게 내려지는 '과도한 피곤함' 이라는 징벌을 동시에 주곤 한다. 내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1년의 2/3 정도를 야간에 근무하는 나로선 오후 5시쯤 카톡에 남겨진 절친의 메시지에 한시간 늦게 대답해주는 정도는, 나름 친구를 배려한 친절한 대응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
- 자냐
- 이제 깼당 왜
- 7시 30분 000 집결
- 이상 통신끝
해석컨대 월요일날 저녁에, 그것도 근무지가 분당인 녀석이 당산동에 위치한 술집에 가서 마시자는 이야기. 아마 또다른 절친 두 명도 오겠지. 그러나 놀라지 않은 것이, 가자는 술집은 절친들과 자주 가던 단골집이고, 애초에 나를 제외하면 - 이 점을 특히 강조하고 싶다 - 술꾼들이라 요일을 가리지 않는 녀석들이기 때문이다. 다들 일에 채여 바쁘고, 거기에 모두 솔로들이라 일상의 변화가 별로 없기에 슬프거나 괴로운 일로 보자는 것은 아닐 터이다. 아마도 좋은 일이 생겼거나 그냥 술 생각이 났겠지.
다른 녀석들을 기다릴 것도 없이 술집에 들어섰다. 흔히 볼 수 있는 소주마시는 술집이지만 꽤나 구식의 낡은 상과 옛날 스타일의 색 바랜 벽지가 어우러져 꽤 지저분해 보여도 나름 친근함을 더하는 이 술집. 안주가 아주 싸고 맛이 괜찮다는 칭찬은 덤. 들어가니 이모가 반갑게 맞는다.
- 어서 온나! 오늘은 몇명이고?
- 다 와요 이모. 저까지 네 명.
- 웬일로 다 모이네? 그래 저기 앉아라~
저기 앉아라, 에서 끝이다. 이 술집은 술과 물을 가져온다던지, 기본안주인 단무지와 무 장아찌를 퍼온다던가, 수저와 술잔을 가져오는 등의 서비스가 모두 셀프다. 단골의 경우에는 주문 내역을 이면지를 대충 잘라서 종이철에 고정시킨 빌지에 적는 것까지 셀프다. 참으로 자유로운 술집이라 아니할 수 없다. 서빙을 이모 혼자서 다 하시는 탓이다. 어쨌거나 난 불만이 없다.
그 사이 도착한 친구 한명은 수저와 잔을 세팅하고, 또 한명은 접시에 단무지와 무 장아찌를 담는다. 난 쇼케이스 위에 붙여진 '한 테이블당 최소 2병' 이라고 적힌 정겨운 종이를 힐끔 바라보며, '그야 물론...' 하고 혼잣말을 던지고 참이슬 한병과 맥주를 꺼냈다. 그나저나, 술집에서 안주를 고르는 일은 고등학생이 첫 담배를 고르거나 짝사랑하는 이성에게 보낼 첫 카톡 메시지를 가다듬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다행히 이 술집은 그리 안주의 종류가 많지 않아서, 손님에겐 의도하지 않았던 편의를 제공하는 셈. 늘상 먹는 계란말이와 순두부찌개를 부탁했다.
조금 지나서 친구 넷이 다 모였다. 아니나 다를까, 날 불렀던 친구의 연봉이 조금 올랐다고 한다. 나같은 하류인생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고만고만한 회사를 다니며 한달 월급에 목매는 사람들에게 연봉인상만큼 술을 불러오는 단어가 또 있으랴. 오늘은 내가 쏜다, 같은 호기로운 말이 터져나와도 오늘은 용서다. 그렇고말고.
욕인지 축하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이 몇 마디 오고간 후 흔히들 술집에서 나누는 이야기들이 시작되었다. 각자의 취미거리나 흔한 누님 욕이라던지 우리 모두 솔로를 절대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감을 공유한다던지. 이야기 중에 계란말이를 뭉텅 잘라서 먹다가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테이블도 꽉 찼고 꽤나 왁자지껄하다. 살다가 삶의 궤적이 꼬리처럼 길어질 때면, 사람들은 으레 그것들을 모아서 소주 한 잔에 담아 입 속에 털거나, 혹은 담배불에 태워 연기로 날려 버린다. 그렇게 술과 담배는 우리네 삶을 위로한다. 국민건강 운운하면서 담배값과 술값을 대폭 올리자고 지랄하는 자들은, 대략 인간 영혼의 말살자라 불러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내 입장에선 그렇다.
손님들이 꽉 차고 모든 테이블에서 주문도 일단 끝나 조금 여유가 생긴 것일까. 이모가 다가온다.
- 얼마나 먹었나~?
- 에~ 소주 세병하고... 맥주 두병, 하고... 계란말이하고... 순두부하고...
- 요기까진 이모가 산다. 알았나?
- 잉!?
몇년 동안 이 술집에 오면서 서비스 안주라던지 하는 건 처음인데. 순간 떠오르는 게 있었다. 한달 전쯤, 친구놈 생일이어서 여기서 한잔 하다가, 어쩌다 보니 이모도 생일이 가깝다는 걸 알게 되었다. 냉큼 밖에 나가서 근처 빵집에서 작은 케이크를 사와 안겨드렸다. 이모는 이런걸 왜 사오냐고 역정 아닌 역정을 냈지만, 그래도 안 받지는 않으시고 주방으로 휙 가지고 들어가셨다. 누가 마산 아지매 아니랄까봐... 아마도 그 때 이후로 계속 마음에 걸리셨나보다.
시간이 지나고, 술이 쎄지 못한 나는 이미 얼굴이 꽤 벌개졌다. 2차를 가러 일어나기로 한다. 친구가 계산을 한다. 인사를 해야지.
- 들어갈께요 이모~
- 그래 가라. 앞으로는 그런거 절대 사오지 마라. 이모는 니네 그냥 자주 와서 술만 많이 마심 된다. 알았나?
- 하하. 네에.
인사도 하고 밖으로 나가려는 우리를 바라보며, 이모가 들릴락말락한 소리로 한마디를 더 하셨다.
- 그날 잘 먹었다. 고맙데이~
끝내 풉, 하고 웃음이 나왔다. 마음을 들킨다는 것, 바로 이런 것이겠지. 술 탓인지 맛있는 계란말이 탓인지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결국 2차는 내가 쏘게 되었고 아침에 일어나니 속이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 아마도 내가 다른 데 정신팔려있는 동안 친구들이 내 맥주잔에 몰래 소주를 꼴꼴꼴 부어넣은 것을 모른체한 덕분이겠지. 조만간에 또 마시러 가야겠다. 이번에도 역시, 좋은 일로 마시게 되길 바라면서.
참고로 이 술집의 계란말이는 정말 싸고 양도 가격 대비해서 정말 많은데,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워 사진 한장 던져본다.
이게 2천원. 저 담배갑은 반명함판 사진보다 약간 크다. 어쨌거나 괜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