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4. 3. 19:45

 일요일이었던 어제, 친구의 결혼식 참석차 강남에 있는 모 예식장에 다녀왔다. 금년 들어 지인들의 결혼이 잦다. 평균 혼인 연령이 서른을 훌쩍 넘겨버린 요즘같은 때에, 나이가 차버린 이유도 있겠지만 시간이 더 흘러도 경기가 풀린다거나 복지가 좋아진다는 등의 희망이 없기에, 빨리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술자리에서의 지인 이야기를 생각하니 쓴웃음이 나왔다.



 결혼식 날 동원할 수 있는 친구들을 학연, 지연 등등 여러 분류에 따라 미리 만난다. 술 좀 얻어마시는 대신 결혼식장에 와서 자리를 채운다는 무언의 약속이다. 괴테 할아버지가 그랬나, 받고 싶으면 먼저 주라고. 어젠 다행히도 괴테 할아버지의 격언을 충실히 따른 감성 넘치는 친구들이 많았다. 강남의 꽤 으리으리해보이는 예식장은 화창한 날씨를 에너지로 삼기라도 하는 듯이, 거대한 위용을 유난히 뽐내며 꽤 많이 참석한 나와 친구들이 수다를 떨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예식장 앞을 너구리굴로 만들며 서로들 안부를 묻거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거나 주식 이야기를 하거나 혹은 여친 없냐? 같은 당연한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올라가봤더니 남자들 뿐이더라, 라는 한탄부터 저녁에 술 마시러 어디로 갈까 같은 퓨처리즘의 선구자 같은 녀석도 있다. 그나마 모바일 TCG 게임에 정신없는 녀석이나 보험을 팔겠다는 녀석이 없어서 조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있는 보험도 한개 남기고 다 깨버린 참이라.



 예식이 시작되면 어디선가 많이 보았고 앞으로도 많이 볼 장면들이 계속된다. 혼인서약도 하고 근엄한 주례사에 양가 부모님께 인사를 하고 축가의 퀄리티에 대해 논하다 보면 예식이 끝난다. 명색이 친구니 신랑 뒤에서 사진 한장 박고, 귀찮은 타이를 거칠게 풀러서 - 왜 목이 불편하게 타이를 두 번 감았을까 후회하는 촌각도 빼놓지 말자 - 가방에 쑤셔넣은 뒤에 식당으로 내려가 뷔페에서 배를 채우고 맥주를 몇 잔 마시고 나면 친구로서의 임무를 완수한 기분에 뭔가 뿌듯하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은 당사자에게나, 친구들에게나 생각보다 짧았다. 아무리 진심없는 정형화된 세상에 맞춰 산다고 해도 마음속으로나마 한 번 진심으로 빌어줘야지. 친구야, 오늘 날씨만큼 행복해라.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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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날도 밤에 일했으니 피곤하고 해서, 빨리 귀가해서 자고 싶었지만 좋은 날씨는 인간의 모든 자유 의지를 누그러뜨리는 효과가 있다. 그냥 집에 가기 아까워서 강남대로를 터벅터벅 걸었다. 일요일 낮인데도 사람이 어찌 그리 많은지. 문득 삶이라는 이름의 거리와 묘하게 오버랩되며 이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표정이 너무나도 뚜렷하게 내 눈에 각인되는 것은, 단지 내가 피곤한 탓이겠지. 시야가 흐려진다.



 누군가는 천천히 걷고 누군가는 뛰고 있다. 어떤 사람은 자전거를 타고 어떤 사람은 차를 타고 더 빨리 가려 안달복달이다. 드물게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우리를 비웃으며 날아가는 자도 있다. 학생들은 대부분 뒤에서 부모가 밀듯이 재촉하는 통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억지로 뛰고, 젊은 친구들은 어떻게든 주위 동기들을 제쳐서 조금이라도 더 앞에 가기 위해 정신이 없다. 그 와중에 누군가는 아예 걷지도 않고 제자리에 서 있거나, 거리 곳곳에 나 있는 구석의 으슥한 샛길에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사실은 그들이 오히려 부럽다. 으슥한 샛길 저편에 뭐가 있는지, 나로선 알 수 없으니까.



 공정하게, 라는 말은 적어도 이 거리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공평하고 공정한 시작을 외치는 소리는 어떻게든 이 거리의 레이스에서 이기기 위해 내지르는 채찍질 소리에 묻혀진 지 오래다. 그나마 날 때리는 채찍이 없어서 다행이다. 남자 한 몸 건사하며 이 거리를 걷는건 그나마 쉬운 일이다. 딸린 식구가 많거나 몸이 불편한 사람들은 간신히 온몸의 힘을 짜내어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는다. 다행히도 저들의 뒤에서 혹은 옆에서 부축해주거나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나마 이 거리가 유지되는 유일한 버팀목이겠지. 모두가 쓰러지고 포기하면 레이스 자체가 성립되지 않으니까.



 시야가 회복되며 다시 강남대로로 돌아오니 교보문고 옆에 흡연장이 보인다.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신에게 감사하며 담배를 물었다. 이 거리는 강남역에서 시작하여 신논현역에 도착하면 일단 끝나지마는, 삶이라는 이름의 레이스는 꽤 길다. 그나마 우리에게 공평한 것은, 이 거리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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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오늘이 만우절이란다.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날이란다. 피식 웃었다. 우린 항상 속이고 속으며 산다. 사람에 속고 시대에 속는다. 힘들지만 행복한 척을 한다. 사실은 좋으면서 싫은 척을 한다. 만우절이라는 날을 고안한 자는 참으로 박애주의자다. 평생을 속고 속이는 게 삶일진대, 그걸 1년에 비록 하루이지만 용서가 되는 날을 만들다니. 이런 인간애 가득한 사람이 또 있을까.



 트윗을 보기 위해서 트위터에 접속하고, 여기저기 사이트에 들려보고 포탈에 접속해서 웹툰도 몇 개 본다. 요즘은 어쩌면 이리 좋은 내용, '일방적으로' 따뜻한 내용의 트윗과 글과 웹툰이 넘쳐나는 것이냐. 방송은 또 어떻고. 언제부터 세상이 이렇게 '일방적으로' 따뜻했나. 몇몇 작가들은 자신이 천사라도 되는 양, 아니 천사라고 해도 너희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거야. 천사를 그린 옛 그림엔 그림자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림자야말로 살아있다는 증거인데. 어두운 면이 없는 자는, 어두운 면을 모르는 자는, 접하는 모든 것의 절반을 잃고 있는거다. 아마도, 속고 있는 게지. 삶의 절반을.



 그렇다고 해도 하루 정도는 속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지나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여긴다. 부디 오늘만은 '선의의' 거짓말만 하기를 기대한다. 누구에게 기대하는지는 비밀. 물론 기대해봐야 별볼일 없다는 건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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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thr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