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7. 6. 07:20


  그는 표정 없이 생각보다 꽤 긴 합정역 안을 천천히 걸었다. 6호선으로 환승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합정역에서 내린 적이 없었기 때문인지, 그는 출구를 나타내는 안내판을 계속 눈으로 좇으며 걸어야 했다. 3번 출구로 향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계단을 터벅터벅 올라 역 바깥으로 나갔다. 어두운 밤하늘에 맞서 출구 바로 옆에 있는 동물병원에서 나오는 형광등 빛이 없었다면, 적막이라는 단어가 제대로 어울릴 터였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그녀를 만나기로 했고, 그러니 기다려야 했다. 보도 한가운데에 서 있을 수는 없었기에, 그는 기다릴 장소를 찾아 눈으로 주위를 훑었다. 역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해 보이는 남자 둘이 그의 시선을 스쳐갔다. 동물병원의 유리창 앞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 있던 둘 쪽으로 걸어가서, 그는 역시 두 남자의 간격에서 두 배 정도 옆으로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자, 약속 시간인 9시까지는 대략 30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남자는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담뱃갑과 라이터를 꺼냈다. 담배를 한 개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다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담배를 다시 담뱃갑 속에 넣고 라이터와 함께 주머니에 넣었다. 왠지 그녀에게 만나면서부터 담배냄새를 풍기기 싫었기 때문이다. 풍겨도 어디건 들어가서 풍겨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뚜렷한 이목구비, 특히 빨려 들어갈 듯이 진하고 맑은 그녀의 눈. 언뜻 여리고 가냘파 보이지만 그 가운데 적당한 볼륨을 잃지 않은 - 아마도 상당한 자기관리가 뒷받침되었으리라 - 그녀의 몸매. 그러나 그가 가장 매혹되었던 점은, 이지적인 그녀의 이미지에 걸맞는 부드럽고 신중한 언행과, 화제의 내용과 수준에서 느껴졌던 그녀의 지성이었다. 표정 없던 그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흘렀다.


  그의 표정에서 미미한 미소를 지우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출구에서 울리는 발걸음 소리였다. 조금 후 쇼츠에 반팔 셔츠를 걸치고 헌팅 캡을 쓴 남자가 출구 밖으로 나왔다. 남자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그 역시도 누군가를 기다릴 자리를 찾는 듯했다. 남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세 남자와 일렬 횡대로 서지 않고 동물병원 맞은편, 도로 쪽에 위치한 작은 버스정류장 유리 앞을 선택했다. 다른 셋과 마주보는 위치였다. 남자는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 뒤, 담배를 꺼내서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호응하듯 맞은편에 서 있는 남자도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담배를 꺼내지 않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다른 남자들을 둘러보았다. 세 남자도 각기 다른 남자들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아무도 말은 없었지만, 넷 모두 같은 입장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것이다. 자대가 어디로 배치될까 전전긍긍하는 훈련소 동기들처럼.


  그는 가장 끝에 서 있는 남자를 보았다. 아마도 이 남자가 이 장소에 맨 먼저 왔으리라. 감색 양복에 옥스포드, 검정색 브리프 케이스를 든 그 남자는, 장미를 한 송이 포장하여 들고 있었다. 장미를 든 손을 등 뒤로 감추고 있는 모습을 보아하니, 나름의 깜짝 선물로 준비해온 듯 했다. 저런 자세로 오래 기다리면 꽤 피곤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괜한 참견은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자신의 옆에서 담배를 피우던 남자를 보았다. 7부 코튼 팬츠에 로퍼를 신고, 폴로 티셔츠를 단정하게 입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굳이 비주얼로 따지자면 이 남자가 가장 훌륭했다. 맞은편에 서 있던 세 번째 남자는 쇼츠에 반팔 셔츠를 매치했는데, 좋게 말하면 활동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껄렁껄렁하다는 게 그의 느낌이었다. 문득 자신이 검은색 진에 회색 스니커즈, 어두운 적색/청색의 체크무늬 남방을 입고 있다는 게 떠올랐다. 굳이 비주얼로 따지자면, 자신이 가장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서로가 머리 속에서 서로를 둘러보며 품평을 하는 동안, 그는 문득 시간이 꽤 지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을 다시 확인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자주 시간을 확인해 봐야 오히려 답답해진다고, 경험이라는 녀석이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첫 번째 남자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그는 꽤 정중한 차림새에 걸맞지 않게 상당히 상기된 얼굴이었다. 숨을 약간 가쁘게 쉬는 것을 보니 꽤 긴장한 듯 했다. 그리고 그 긴장을 깬 것은 다시 출구에서 울리는 발걸음 소리였다. 또각 또각 울리는 하이힐 소리. 네 남자는 동시에 서로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3번 출구로 향했다.


  역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커리어우먼이라는 단어에 딱 어울릴 이미지의 검정색 여성용 정장을 입은 여자였다. 동물병원 쪽으로 여자가 시선을 돌리는 동시에, 양복을 입은 남자가 여자에게 다가갔다. 서로 가볍게 인사를 하고서, 남자는 여자에게 꽃을 내밀었다. 여자는 놀라움과 감격스러움의 겹침을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는 서로 팔짱을 끼고 둘은 걷기 시작했다. 세 남자 사이를 통과하며, 첫 번째 남자는 격려와 만족이 섞인 얼굴로 세 동기들을 둘러보았다. 한 남자는 하늘을 보며, 또 다른 한 남자는 옆을 보며 애써 외면했다. 그는 표정 없는 얼굴로 첫 번째 커플을 쳐다보았다.


  둘의 모습이 어둠 속에 묻히자, 그를 제외한 남자 둘은 다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는 여전히 표정이 없었고 담배를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표정과는 달리 머리 속에선 후회가 그를 몰아붙였다. 이왕이면 좀 더 괜찮은 옷을 입고 나오는 게 좋지 않았을까. 옷이 날개라는 것은 절대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이 정도면 그냥 무난하겠다고 생각하고 덜렁덜렁 나온 것인데. 그와 동시에 일주일 전, 그녀와의 첫 만남도 떠올랐다. 어쩌다 보니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알게 되었고 실제로 만나게 되었지만, 그것은 어쨌거나 소개팅과는 거리가 먼 단순한 가벼운 식사 약속이었다. 거기에, 그녀는 그가 표정이 없는 것에 대해서 우려를 표했던 기억이 났다. '밝은 표정을 지으면 훨씬 좋을 것 같네요.' 같은 뉘앙스의 말이었던 것 같다. 후회는 꼬리를 물고 또 꼬리를 물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린 것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서였다. 그 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을 한, 깔끔한 이미지의 여자가 그의 옆에 있는 남자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정작 그 남자는 딱히 반갑지 않은, 하지만 미묘한 미소를 띈 얼굴로 여자를 맞았다. 오랫동안 알아온 사이처럼 남자는 긴장하지도, 상기되지도 않았다. 두번째 커플은 자연스럽게 서로의 손을 잡고, 보도 가운데로 두 남자 사이를 지나갔다. 두 번째 남자는 지금의 상황이 매우 당연하다는, 어찌 보면 교만하기까지 한 표정을 지었고 거기에 알듯말듯한 미소를 덧붙여 두 동기에게 던졌다. 다른 남자는 역시 옆을 보며 모른체했고, 그는 약간 고개를 숙여 시선을 땅으로 향했다.


  맞은편의 남자는 담배를 다시 꺼내서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세 번째 남자는 왠지 안절부절 못한 것 같았다. 뭔가 약간 화가 난 얼굴로 혼잣말을 하는 것이, 8시 30분에 만나기로 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그는 담배 대신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시간을 확인하니 8시 55분이었다. 그녀와 만나기로 한 시간까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녀는 약속 시간에 절대 늦지 않으리라. 그러나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하자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긴 커녕 조금 급해졌다. 두 번째 남자의 건방져보이는 얼굴 탓이었을까. 기분이 약간 불쾌하기도 했다. 훈련소와 자대의 차이가 뭐 얼마나 된다고.


  그러다 보니 그는 불쾌했지만 자신을 돌아봐야 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자신은 얼마나 매력이 있는지에 대해서 판단해야 했다. 완벽에 가까운 그녀에게 감히 애정을 품으려면 그 자신부터 변해야 되겠다는, '진부' 라는 제목의 자기계발서 같은 생각이 머리를 강타했다. 다시 한 번 오늘의 복장에 대해 후회가 밀려왔다. 관리를 하지 않아서 차츰 나오고 있는 자신의 배가 미워졌다. 표정 한번 밝게 짓지 못하고 어색함과 무표정으로만 일관했던 자신의 얼굴에 실망했을 그녀를 상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주먹을 꽉 쥐고는, 흔한 멘토들의 단골 소재거리인 긍정의 에너지를 어거지라도 끌어내려 머리속에서 애를 썼다. 일부러 얼굴 근육을 움직거리며 눈을 크게 뜨거나, 조커처럼 입을 옆으로 쫙 벌려보기도 했다. 밝은 표정의, 건장한 체격의, 지성과 유머를 가진 자신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를 만났다. 밝게 웃는 얼굴로 그는 그녀를 맞았다. 긴 대화간에, 그는 그녀의 웃음과 진지함을 모두 이끌어냈다. 분위기가 무르익고 홍대의 밤거리를 걷는 와중에 그는 문득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걸음을 멈추고, 그는 그녀에게 진심을 담아 좋아한다고 말했다. 약간의 침묵 후에, 사랑스러운 얼굴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녀를 꼭 안았다. 그녀의 부드러운 품과 머리카락에서 나는 향기에 그만 취해버렸다.


  그의 취기를 한 순간에 깬 것은 발걸음 소리였다. 역 안에서 메마른 거리를 향해 유난히 크게 울려퍼지는 발걸음 소리. 잠깐 상상에 빠지긴 했지만 지금쯤은 분명 9시가 되었을 것이고, 그녀가 이제 도착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그는 차분한 얼굴을 그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짧은 시간 동안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를 썼다. 괜히 자신의 한심한 상상의 편린이 혹여나 그녀에게 전달되면 어쩌나 싶어 그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동시에 그와 남자는 약속이나 한 듯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출구로 시선을 향했다.


  출구로 얼굴을 내민 것은, 그가 모르는 여자의 얼굴이었다. 그보다 나이가 꽤 적어 보이는 젊은 여자였다. 민망스러울 정도로 치마가 짧았기에, 그는 눈동자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 버스정류장 앞에서 여전히 담배를 피우고 있던 세 번째 남자는 담배를 털어버리고 꽁초를 땅에 휙 버린 뒤, 그 여자에게 다가가 힘껏 껴안았다. 여자는 뭐가 그리 좋은지, 남자의 품에 안기며 계속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온통 껴안고 입맞춤을 퍼부으며 사랑의 밀어를 거리 위에서 속삭이는 민폐를 그에게 실컷 끼친 후에, 세 번째 남자는 한쪽 팔로 여자의 허리를 감은 채 천천히 그를 지나갔다. 마치 화투를 치다 먹을 것이 없어 흑싸리 껍닥을 내던졌는데, 뒤집어 광을 먹어 운 좋게 삼광으로 나버린 듯한, 3점짜리 비릿한 웃음을 지은 채로였다.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마지막 커플이 자신을 지나가고 나서, 그는 동물병원 유리창에 등을 기댔다. 힘 빠진 얼굴로 그는 가쁘게 숨을 몇 번 쉬었다. 그리고 얼굴이 일그러진 채,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켜려는 순간, 그는 천천히 담배를 입에서 뺐다. 기댔던 몸을 일으키며 담뱃갑에 담배를 집어넣고 라이터와 함께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꺼내며 다른 손으로 자신의 등을 털었다. 전화가 왔기 때문이었고, 물론 그녀의 전화였다. 그녀는 3번 출구 반대쪽에서 걸어오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는 통화를 마친 후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출구 반대편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그는 머리를 좌우로 몇 번 흔들었다. 얼굴 근육을 다시 움직거렸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몇 번 문지르기도 했다. 멀지 않은 시야의 끝에, 손을 흔드는 그녀가 보였다. 그 역시 손을 한 번, 천천히 들었다. 그리고 그녀와 가까이 마주섰다. 그녀는 미안함이 섞인 - 사실은 몇분 늦지 않았는데도 - 얼굴로 말했다.


  " 늦어서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어요? "


  지난 주와 똑같이, 표정 없는 얼굴로 그가 대답했다.


  " 괜찮아요. 저도 방금 왔습니다. "












p.s 처음 올린 텍스트에서 약간의 퇴고를 거쳤습니다. 띄어쓰기하고 맞춤법은 여전히 절 괴롭히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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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thril